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산도 대첩 (문단 편집) == 기타 ==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영지 규모 및 동원 전력(1,500명)으로 큰 규모의 함대를 운용하는 것은 과장이라는 논란이 존재했다. 다만 이런 식의 논란을 처음 시작한 장본인은 2005년 지금은 없어진 모 야구 사이트 게시판에서 루XX라는 닉네임을 쓰던 네티즌인데[* 자기가 군복무를 하는 도중에 고시 공부를 해서 서울대에 합격했고 자기 삼촌이 공군 장성이라고 주장했는데, 네티즌들의 추적 결과 모두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났다.], 평소부터 극단적인 [[혐한]], [[국까]], [[일뽕]] 성향이라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어그로를 끌었다. 결정적으로 루XX는 영국 해군 제독인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는 이순신을 찬양한 일이 없다고 박박 우기다가[* 자기가 그 책을 가지고 있으며 직접 읽어보았다고까지 주장했다(...)] 막상 [[밀덕]]으로 유명한 dreadnought가 발라드 제독의 저서 "The Influence of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1921)에서 이순신을 열렬히 찬양한 부분을 스캔을 해서 인터넷 게시판에다 올리자, 자기가 쓴 글들을 빛의 속도로 몽땅 지우고는 잠적해 버렸다. [[다이묘]]들은 영지규모 1만 석당 병력 250~ 500명 정도 동원이 가능했는데, 와키자카는 3만 석 규모인 영주로서 일본 사료에서 조선에 출병한 병력은 약 1,500명 정도였다. 이전에 참전했던 오다와라 포위전 등에서도 엇비슷한 병력을 동원하기 때문에, 와키자카가 갑자기 더 큰 병력으로 수군을 이끌고 나타날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베시마 가문의 문서에 따르면 와키자카의 부대는 선봉대가 조선에 상륙한 이후로 [[우키다 히데이에]]의 진영에 소속한다는 기록이 있고 해전 당시 격파한 적선에서 노역하는 조선인 포로들을 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 포로들과 와키자카 본인과 우키다 히데이에의 수군 세력, 그리고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은 세토 내해 동부 해적 세력들, 용인 등 내륙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 인부들이 포함된 숫자일 가능성이 있다.[* [[임진왜란]] 시절, 일본 수군에 소속된 배를 조종하는 선원(가령 배 아래 선실에서 노를 젓는 격꾼들)이나 기타 필요한 인부들은 모두 일본에서 따로 징발해서 조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한산도대첩에서 죽은 일본군 중에서는 전투원뿐만 아니라 일본인 선원이나 일본인 인부들도 포함되었다고 봐야 적절하다. 그런데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계급차별이 매우 심해서, 전투원이 아닌 비전투원들은 군인의 수에 포함시키지 않았을 따름이다. 이렇게 비전투원을 멸시하는 성향은 일본에서 매우 오랫동안 이어졌는데, [[2차대전]] 때에도 일본에서는 "보급병이 군인이면 잠자리도 새다."라는 말이 나돌아다닐 정도였다.] 와키자카가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 등이 같이 출전한 안골포 해전보다도 많은 함대를 이끌고 한산도 근해에 나타났으므로, 상당한 전력을 갖춘 함대가 출전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는 이전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마주한 일본 수군들 중 규모가 제일 컸다. 견내량은 폭이 좁기 때문에 대함대가 한데 뭉쳐서 진군하기 어려우므로 길게 늘어서서 돌진해야 했다. 일본 수군이 완전히 몰살당했음은 조선 수군이 반포위 진형을 갖추었는데도 일본 수군이 그 안에 머리를 들이밀고 나서도 계속 돌진했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지상전에서 이런 반포위 진형의 약점이 중앙돌파이고 조선 수군의 취약점이자 일본 수군 최대의 장기가 근접전이기 때문에, 이미 전황이 안 좋고 일부 피해를 보더라도 중앙돌파를 하겠다는 의도였던 듯하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어서 정말 나빴다. 와키자카는 이 전투에서 실로 참담한 패전을 겪었음에도 이를 모두 정직하게 기록으로 남겨서 후세에 전했다. 허세는 기본이요, 무공은 마구 부풀리고 패배는 애써 축소했던[* 다양한 주인을 섬기기를 미덕으로 여긴 [[센고쿠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무사들이 자기 이력서라고 할 수 있는 전공 기록을 과장하는 건 이미 문화나 다름없었다. 모범적인 무사라고 알려진 가토도 공을 부풀리거나 거짓 보고를 하다가 걸리기도 했다.] 당시의 무사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인물이었고, 그 덕분에 한산도 대첩 전후 일본 측 사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다. KBS 역사스페셜의 일본 측에서 바라본 [[이순신]]과 일본 측의 이순신 관련 사료들을 탐구하는 에피소드에서 와키자카 가문의 현 당주이자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14대손인 와키자카 겐지 씨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와키자카는 이 날의 패배를 기억하기 위해 본국에 돌아와서도 집안 사람들이 한산도 해전이 일어난 날만 되면 반드시 다른 것을 먹지 않고 [[미역]]만 먹도록 했다고 하며, 그 전통이 무려 500년이 지난 자신의 대까지 남아 있어서 자신은 한산도 대첩 날을 '집안 사람들이 미역만 먹는 날'로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파일:1515.gif]] 와키자카의 영지였던 [[효고현]] 아와지에는 이 해전에서 전사한 30여 명의 명복을 비는 고려진타사중공양석비(高麗陣打死衆供養石碑)가 세워져 넋을 달랜다. [[칼의 노래]] 1권 권말에 수록된 연보에는 "마나베가 패잔병 500여 명을 이끌고 무인도에 상륙했다가 나갈 곳이 없어서 할복 자살했고, 병사들은 다 굶어 죽은 듯하다"고 했다. 소설 본문에 이와 같은 서술이 있었다면 각색으로 볼 수 있지만,[* 실제 조선 수군이 해전을 한산도에서 벌인 것엔 이런 계산 또한 있었다. 근처에 무인도뿐이라 패잔병이 표류하더라도 식량을 구하기도, 탈출하기도 쉽지 않았다. 또한 당시의 조선군 시점에선 첩보가 정확하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있다.]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서술해야 할 연보에 이와 같은 서술이 있으므로 오류이다. 의외로 한산도 대첩은 한국사 3대 대첩 중 가장 규모가 작은데, 이것은 그냥 [[일본군]]이 [[거란]]군이나 [[수나라]]군보다 적었기 때문이고(...)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만 명이 아니라 10만 명이었든 20만 명이었든 낚여서 포위망 안으로 걸어들어간 이상 궤멸은 확정된 전투였다. 그리고 [[을지문덕]]이나 [[강감찬]]은 대군을 단 한 번의 전투로 박살냈지만, [[이순신]]은 수십 번의 전투를 '''전승하는''' 방식으로 일본군을 몰락시켰기 때문에[* 그러니까, 정말 가능성은 낮지만 [[김천일]]이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했다면 김천일이 을지문덕이나 강감찬과 유사하게 보였을 것이다.] 한산도 대첩은 이순신이 벌인 무수한 전투 중 하나에 불과하므로 결전 한 번으로 다 무너뜨린 강감찬이나 을지문덕과 비교해서는 곤란하다.[* 사실 살수 대첩이나 귀주 대첩은 한번이 결전을 통해 적을 완전히 전멸시킨 전투로 유명하지만 한산도 대첩은 오히려 어느 쪽이냐 하면 미드웨이 해전과 비슷한 쪽으로 그 피해 자체보다는 전략적인 의미가 더 강조되는 편이다.] 전라 좌수영이 있던 [[전라남도]] [[여수시]]에는 종고산(鐘鼓山)이라는 해발 199미터짜리 나지막한 산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대첩에서 이기던 날, 이 산에서 종(鐘)소리 같기도 하고 북(鼓)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나서 사흘간 이어졌기 때문에 이순신이 산 이름을 '종고산'이라고 붙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